사람

나무와 동화되고 있는 나무 아저씨-<록지원> 이욱주 씨

2me4you 2008. 11. 5. 14:37

나무와 동화되고 있는 나무 아저씨

<록지원> 이욱주 씨


인생이라는 거친 풍랑 위에서 비바람이 치고 눈보라가 일어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이겨낼 수 있는 것은 누가 시킨다고 되는 게 아니다. 제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라도 끝까지 해 낼 수 있는 힘은 바로 자신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나무가 좋아 나무에 미쳐 평생 나무를 키우는 일에 힘써온 <록지원>의 이욱주(62) 씨 또한 바로 그런 사람이다. 단순히 경제적 효용가치로만 따졌다면 벌써 그만두고도 남았을 이 일을 벌써 30년 넘도록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저 나무가 좋아 자연을 벗하며 육신의 노동을 통해 양식을 구하고, 욕심 없이 자라는 나무들과 함께 숨 쉬고 대화하면서도 아직도 나무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분. 청록의 계절 5월에 상록수처럼 푸른빛을 간직한 그를 만나보았다.


30년 세월 속에서 농익은 나무농사 

<록지원>이 있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에 있는 양지마을은 이욱주 씨의 고향이기도 하다. 어릴 적 심어놓은 나무들이 자신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다는 그는 젊은 시절, 나무가 좋아 그저 시간만 나면 이산 저산 나무를 찾아다녔다. 그런 그에게 “그렇게 나무가 좋으면 나무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살지 그러냐”는 아내(김영혜)의 말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나무 키우는 일에 매달린 지 어언 30년이 지났다.

농사일도 손이 많이 가지만 나무를 키우는 일도 그에 만만치 않다. 파종을 한 뒤 제법 키가 자란 묘목이 되기까지 시기, 방법, 장소, 환경을 모두 고려해 옮겨심기를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하는지 모른다. 게다가 매년 수확을 하는 한 해 농사와는 다르게 1년 2년이 지나도 눈에 뜨이게 달라지는 게 없는 게 나무농사다. 그러니 세월을 낚는 강태공마냥 기다릴 줄 모르면 나무 농사를 지을 수 없다. 이런 일에 돈이 잘 돌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지사다. 큰아이가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병원비가 없어 퇴원을 시킬 수가 없었던 적도 있다니 지금까지 겪은 고초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그러나 아내의 내조가 있었기에 무던히도 견뎌낼 수 있었다는 이욱주 씨. 부창부수라고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로 다져져 어지간한 장정 못지않은 일을 해 내는 그의 아내는 남편의 나무사랑을 잘 알기에 쪼들리는 살림을 헤쳐 갈 방편으로 박 공예를 배워 강습을 하면서도 남편의 꿈을 꺾지 않았다.

이런 주인장의 관록이 말해주듯 <록지원>에는 유난히 푸르른 소나무가 많이 보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가지가 옆으로 퍼져 마치 쟁반 같은 모양이 된다고 해서 쟁반 반槃 자를 쓴 반송이 파종 중인 모습에서부터 1년생 2년생 3년생 5년생 등 아주 어린 묘목을 거쳐 20~30년 된 나무들에 이르기까지 무성하다. <록지원>에 있는 000여 종의 나무들 중에 지금 가장 효자노릇을 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반송나무라고 한다. 이곳에 있는 반송 중에는 고 이병철 회장이 탐을 낸 나무도 있단다. 지금의 에버랜드에 옮겨 심을 요량으로 팔라는 요청이 왔으나 그 나무는 파는 나무가 아니라며 사양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나무에 대한 이들 부부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다. 늘 돈이 되는 나무를 심기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나무를 심어 아내에게 구박을 받는다는 이욱주 씨. 그러나 서로에 대한 믿음과 나무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낸 인고의 시간이 있었기에 오늘날 이토록 멋진 터전을 일궈 놓았으리라. 


일본으로 수출한 소사나무

<록지원>의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주시며 나무 하나하나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의 모습이 마치 사랑스런 연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더없이 정겹다. 젊은 날 충남 태안에 있는 <천리포수목원>에 나무를 보려고 비포장 길을 걸어서 물어물어 찾아갔던 경험, 당시 천리포수목원의 설립자 밀러(민병갈) 씨가 나무를 사랑하는 젊은이를 만나 더없이 기쁘다며 기꺼이 내준 손가락만한 묘목이 지금 이렇게 큰 굴피나무가 되었다는 이야기, 복자기 단풍의 씨앗을 얻으려고 장비도 없이 10m가 넘는 나무에 올라가 애써 채취한 씨앗을 산림청 직원에게 빼앗겼다는 웃지 못 할 사연, 이팝나무 서식지를 찾아 아이들까지 데리고 어청도까지 들어간 이야기 등 그간 나무와 함께 동거동락하며 겪은 일화를 말로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욱주 씨가 잊지 못하는 일은 바로 소사나무에 대한 일이다. 그가 반송과 더불어 제일 아끼는 나무 중의 하나인 소사나무는 우리나라 특산품 중 하나다. 이 씨앗을 얻으려고 수년간이나 공을 들였지만 쉽지가 않았다. 종묘사에 미리 돈을 지불해놓고 기다려도 도대체 씨앗을 구할 수가 없어서 영문을 알아보니 씨앗을 죄다 일본에 팔아 넘겼더란다. 견디다 못해 직접 종자를 채취하려고 나섰는데 나무를 잘 모르는 일꾼들이 일을 잘못해서 벌목꾼으로 까지 몰렸다고.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얻은 종자로 심어놓은 나무를 몇 년 뒤 소사나무를 찾아 이곳까지 찾아온 일본 회사에 수출을 하게 된 것이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일본에 초청까지 받았는데, 후일 외국인들은 우리 씨앗을 가져가 어떻게 육종하고 원예화 하는지 보려고 독일로 프랑스로 스위스로 이태리로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다니던 시절 독일의 한 농장에서 일본에서 들여왔다는 소사나무를 보고 내가 키워 보낸 나무가 여기까지 와 있구나 싶어 감회가 새로웠단다.

그의 꿈은 지금까지 애써 가꾸고 공들여온 이 나무들을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조경과 수목이 혼연일체가 된 수목원을 만드는 것이다. 그 꿈을 이루려고 늦은 나이에 환경조경학 석사과정까지 밟았다. 유럽식인지 일본식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우리나라 조경을 이 땅의 숲과 계곡을 그대로 살린 한국형 조경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우리 것을 살리고자 하는 그의 굳은 의지와 노력은 마침내 빛을 발휘해 작년에는 조경생태분야에서 서울시에서 주는 환경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작은 씨앗하나가 싹을 틔우기까지 말 못하는 나무들이 치루고 있을 엄청나고도 치열한 내면의 세계를 온몸으로 느끼고 체득하면서 점점 더 나무의 삶에 동화되어 가고 있는 이욱주 씨. 저 높은 에베레스트에 올라 머리가 지끈거리는 고산병에 시달리면서도 그곳 종자를 담아오는 열정이 바로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원동력일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한눈팔지 않고 열정과 노력을 쏟으면 언제고 빛을 보는 날이 온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나무아저씨’를 만나고 오는 날, 봄을 부르며 노래하는 연초록의 신록이 더없이 아름다웠다.  

(20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