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마음이 준 선물
-아픈 몸으로 <산귀래 식물원> 일군 박수주 씨
마음이란 무엇일까? ‘마음’을 다룬 6부작 다큐멘터리를 보면 인간의 마음이 몸을 지배하고 생각까지도 조절하는 힘이 있다고 한다. 예전부터 어르신들에게 뭐든 마음먹기 마련이다,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게 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선지 그저 막연히 믿었던 일들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되면서 다양한 예들이 제시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큐를 보고 난 후 대체 마음이란 게 무엇이기에 없는 병을 만들기도 하고 있던 병도 낫게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내내 떠나질 않았다. TV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세상에 듣도 보도 못한 병이 참 많이 나온다. 베체트병, 파티슨병, 월슨병, 루게릭병, 버거씨병 등등… 정확한 증상이 떠오르진 않지만 한 번씩 들어본 병명이다. 공통점은 모두 희귀성 난치병이라는 것. 박수주 씨 또한 이런 병을 가진 분이었다. 특이한 것은 본인의 병명을 명확히 모르고 지내다 완치가 된 후에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여곡절 끝에 알게 된 병명
초등학교 때부터 유난히 입안이 잘 헐고 아팠다는 박수주 씨. 처음엔 그저 피곤해서 그런 것이라고 치부하기 일쑤였다. 단순히 몸이 약해 그런 것이라 여겨 이것저것 약도 많이 먹었으나 증세가 없어지진 않았다. 병원을 가도 속 시원히 어디가 어떻게 안 좋아서 그렇다고 명확하게 말해주는 의사가 없었다. 양의는 양의대로 한의는 한의대로 조금씩 다른 의견을 말해 혼동만 줄 뿐이었다. 정확한 병명을 진단받지 못했으니 근본적인 치료법 또한 찾지 못했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병원과 한의원을 전전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체질을 바꿔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40대로 접어들자 이상하게도 관절이 심하게 붓고 아파왔다. 당시 가족들을 서울에 두고 양수리에서 사슴농장을 할 때라 병원에 함께 갔던 사람도 자생식물보존모임에서 알고 지낸 지인이었다.
1993년 대학병원에서 여러 검사를 받으면서 입원해 있을 당시 보호자를 자청했던 지인에게 의사는 엄청난 말을 했다. 환자가 희귀성질환인 베체트병이라는 것과 지금은 증상이 많이 악화되어 몹시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여러 복합적인 증상이 나타나기 전까진 명확한 진단을 내리기 힘든 병이었던 것이다.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던 원인모를 증상들의 병명이 밝혀지는 순간이었으나 정작 본인은 모르고 지나갔다. 이유는 의사가 지금은 통증이 심할 단계라 환자에겐 되도록 알리지 말고 마음을 편하게 해주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저 관절염이려니 생각했던 지인은 병명을 듣고 너무도 놀라 가족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도 못한 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이들은 아직 어리고 남편 연락처도 몰라 궁색하게 혼자 애만 태우고 있던 중에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녀가 퇴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뜻하지 않게 그녀 남편의 부고를 들었다. 한달음에 달려온 지인은 장례식장의 그 누구보다도 슬피 울었다. 어린 상주보다 더, 부인보다도 더 애달프게 우는 낯선 여자를 보고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겼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몰랐다. 병원에서 무서운 진단을 받은 그녀가 갑작스레 남편을 잃고 어린 두 자식을 안은 채 혼자 몸이 되자 너무도 불쌍하고 가여워 눈물이 앞을 가리지 않았던 지인. 지금은 두 사람이 지난 일을 웃으면서 회상하지만 당시 한 사람은 엄청난 비밀을 안고 있었던 셈이다.
일과 자연이 불어 넣어준 숨결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을 떠나보내고 가장이 되어버린 그녀는 마음을 추슬러 온힘을 기울인 일이 자연 속에서 꽃과 나무와 씨름하는 것이었다. 산자락을 깎아 길을 내고 연못을 파고 축대를 쌓아 집을 짓고 주위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가꾸는 일에 몸과 마음을 다했다. 병원에서는 무리하면 안 된다는 몸이었는데 그걸 알 리가 없는 그녀는 자고 일어나 눈만 뜨면 몸을 움직여 일을 했다. 하긴 그걸 알았더라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한번은 무거운 것을 잡아당기다 허리를 다쳐 꼼짝할 수가 없어 병원에 실려 간 적도 있었는데 의사가 척추 뼈 사이의 연골이 반으로 줄어든 X레이 사진을 보여주며 힘든 일을 계속 하면 디스크로 발전해 평생 고생할 것이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음에도 그녀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다시 X레이를 찍어보았으나 신기하게도 연골의 높이가 다른 부위와 똑같아져 있었어요. 그래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들꽃 나무들과 함께 하는 노동은 건강 유지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그녀의 말이다.
겁 없이 보호자를 자청해서 베체트 병 진단을 대신 들었던 지인은 그런 그녀를 곁에서 챙기고 배려하며 묵묵히 지켜보았다. 자신의 몸이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모른 채 무던히 자연을 가꾸며 치열하게 살았던 것이 오히려 약이 되었는지 그녀의 몸은 거짓말처럼 자연스럽게 치유되고 있었다. 그녀가 점점 건강해져 가는 것을 느낀 지인은 비로소 당시의 이야기를 전했다. 사연을 듣고서야 마침내 지인이 장례식장에서 왜 그토록 슬피 울었는지 이해가 되었다는 박수주 씨. 지금은 이 모든 것이 자연이 준 축복이라고 믿는다.
지금도 박수주 씨는 여전히 틈만 나면 몸을 움직여 꽃을 가꾸고 도자기를 만들고 천연염색을 하면서 누구보다도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자연 속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의학적 지식으로 말하는 배체트병의 치료는 약물치료와 함께 적절한 휴식과 운동을 해 긴장을 풀고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해야 한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박수주 씨는 약물치료를 등지고 묘한 인연의 끈으로 자신이 희귀병 환자라는 우울한 마음의 병을 덜었던 셈이다. 그리고 자연 속에서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면서 병마를 이겨낸 기적을 만들었다. 그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문득 이런 말이 떠올랐다. “일해서 죽는 사람은 없다. 일 안하고 몸 사리는 사람이 더 병이 많다.” 그 옛날 어르신들이 입버릇처럼 하시던 그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오는 날이었다.
※박수주 씨가 정성들여 가꾸어 온 터전은 <산귀래식물원>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1996년 개원하여 몇 차례 들꽃축제를 열었다. 자연을 좋아하고 꽃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입소문이 나면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곳이었으나 아쉽게도 지금은 자연휴식년제 기간이라 일반인들의 출입이 불가능하다.
(2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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