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사상은 과거의 사상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사상입니다. 제가 사회 인식을 말하면서 고전 강독을 해온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고전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통해서 미래에 관한 전망을 하자는 것이지요. 근대적 가치에 대한 재조명은 근대 사회를 부단히 성찰하는데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성찰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최고의 인식이라 생각합니다. 인식과 성찰을 이야기함에 있어 제가 쓴《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오는 일화 하나가 이에 맞닿아 있는 것 같아 예로 듭니다.
매일 똑같은 일상뿐인 한 감옥에서, 소일거리 삼아 가장 빨리 달리는 20대 청년과 가장 느린 50대 노인의 경주가 열렸습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를 실험한 게 아니라 청년은 한 발로 노년은 두 발로 뛰는 승부였습니다. 과연 누가 이겼을 까요? 결과는 초라한 50대가 팔팔한 20대를 거뜬히 이겼습니다. 우김질 끝에 장난삼아 해본 경주라 망정이지, 정말 다리가 하나뿐인 불구자의 패배였다면 그 침통함을 형언키 어려웠을 겁니다.
이 우스운 경주를 보면서 뜻밖에도 한 발 걸음의 한계를 깨달았습니다. 나아가 이론과 실천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삶이 바로 한 발 걸음과 다르지 않다고 여겨졌습니다.
감옥살이에서 느낀 가장 큰 불편함이 바로 실천의 부재입니다. 노역은 있으되 사회적 실천이 배제된 공간에서 아무리 좋은 책을 읽고 많은 이론을 안들 쓸모가 없었습니다. 지식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자각이 든 후 제가 처음 목발로 삼은 것은 다른 사람들의 경험, 즉 ‘과거의 실천’이었습니다. 인식이라는 생다리를 가지고 과거의 삶을 목발로 삼은 것이지요. 그 목발을 얻기 위해 그들 속에서 부단히 부딪기며 관계를 쌓아갔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저는 책도 많이 읽었지만 기술도 열심히 배웠습니다. 그 속에서 만난 사람들이 제겐 모두 하나같이 큰 스승이었습니다.
인간관계란 철저한 자기인식을 바탕으로 타인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자기 할 말을 다하게 하는 위치에 앉혀놓는 것을 말합니다. 상대를 소리 없이 사라져 가는 엑스트라가 아니라 죽을 때 죽더라도 자기 할 말은 다 하게 하는 영화 주인공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이해 속에서 관계가 싹트고 그 관계 안에서 우리는 조금씩 변화되어 갑니다. 이러한 타인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관계 맺음 속에서 자신을 변화시켜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자기 발전과정이라고 봅니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사고의 틀이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엄청난 산고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이 힘겨운 자기 개조는 관계 속에서 만이 이루어집니다. 관계없이 자신의 관념으로만 변화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요.
감옥에 있는 동안 맨 처음 그 안에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과의 관계가 자연스러워 지는데 근 5년이 걸렸지요. 그동안 재단, 간판, 목수 등 열심히 배웠습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임을 뼈저리게 느꼈지요.
그렇게 처음 그들의 경험을 저의 목발로 삼았을 때 뒤뚱거리고 넘어지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목발에 손때가 묻으면서 놀랍게도 목발이 생다리를 닮아 가는 게 아니라 생다리가 목발을 닮아가더군요. 투박하고 불편해서 내 발 같지 않았던 ‘목발’이 오히려 나중에는 제 삶의 준거가 되었습니다.
관념과 인식의 세계를 뜻하는 ‘생다리’는 언뜻 보기에 ‘목발’로 상징되는 투박한 실천의 힘보다 우월해 보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관념의 세계가 깊고 지식이 넓어도, 실천의 힘이 없다면 죽은 지식에 불과합니다.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라 봅니다. 내 삶이 바로 이 한 발 걸음 임을 인식하고, 타인의 삶과 경험으로 두발 걸음을 완성할 때, 자신을 보다 발전시키고 완성 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삶의 실천이라 생각합니다. 사람이 있고, 일거리가 있는 곳엔 어디든 이 실천의 자리가 있습니다.
자기를 깨뜨리고 마음의 감옥을 벗어나 성 밖의 사람을 만나는 것이 곧 성찰이고, 성장으로 나아가는 길임을 잊지 마시고, 늘 처음처럼 열심히 관계를 맺어 자기 성장의 기회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위 내용은 성공회대 대학원에서 <함께 읽기> 강좌를 하고 계신 신영복 선생의 강의를 듣고 월간 《당신이 축복입니다》가 정리한 것입니다.
처음처럼 - 신영복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다시 새 날을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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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든든한 지성으로 자리하신 신영복 선생님은 감옥에서 나온 뒤 줄곧 성공회대에서 교직생활을 해오셨습니다. 2006년 8월, 17년간의 교직생활을 마감하는 퇴임식을 치른 후 석좌교수로 남아 일체의 청탁을 마다시고 성공회대 대학원 <함께 읽기> 강좌를 하시면서 조용히 집필을 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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