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남긴 복잡한 유산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반세기가 넘었건만 우리는 여전히 휴전선 철조망을 걷어내지 못하고 평화 통일의 과제를 안고 망향과 이산의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80년대 초 사람들에게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감동을 안겨준 것은 바로 TV를 통해 생중계 되었던 ‘이산가족 찾기’였다. 휴전 30년을 맞아 특집으로 제작된 이 프로는 국민들의 뜨거운 호응으로 무려 136일간에 걸쳐 453시간 45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산천을 울리며 온 겨레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우리의 눈과 귀를 집중시켰던 이 방송은 세계방송사상 유례없는 일이 되었다. 이런 벅찬 감격과 흥분 속에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인간드라마를 보고 전후세대의 아픈 현실을 배우며 자랐으니, 직접 전쟁을 겪진 않았지만 30대만 해도 분단현실의 아픔을 어느 정도 느끼며 살아온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의 젊은 세대들에게 이와 같은 마음을 기대할 수 있을까?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는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줄곧 부르고 배우며 자랐던 그들의 부모 세대만큼 정말 간절히 통일을 원하고 있을까?
일련의 보도들을 보노라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학생들에게 통일에 대한 찬반 투표를 해보면 예전처럼 당연히 해야 된다는 아니더라도 찬성이 단연 우세하지도 않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말이다. 젊고 똑똑한 친구들이 치밀한 경제논리와 힘과 정치적 논리를 가지고 통일이 반드시 우리에게 이득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주장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서글픈 심정이 되곤 한다. 그런 실리와 명분을 앞세운 주장들이 머리로는 이해될지 모르나 가슴으로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스포츠 선수로 세간의 관심을 끄는 두 선수가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 유능한 유도선수로 활약하다 이종격투기 선수가 되어 돌아온 추성훈과 베이징 남북축구 대결 때 북측 대표선수로 나온 정대세가 그 주인공이다. 나는 이들을 볼 때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분단의 현실과 전쟁이 남긴 뼈아픈 유산을 보는 듯해 애잔한 느낌이 든다. 그가 왜 그토록 한국국가대표가 되고 싶어 했는지, 우수한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나라 국가대표가 될 수 없었는지, 왜 한국국적을 포기하고 일본 국가대표가 되었는지, 왜 아버지는 한국 어머니는 무국적을 가진 부모를 가져야 했는지, 왜 일본에 살면서도 조선학교를 택해서 다녔는지, 왜 한국 국적을 포기하면서까지 북한대표가 되어야만 했는지… 그들이 처한 차마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현실과 지나온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 비록 총칼을 들고 싸우는 전쟁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을 치루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유치원생인 조카가 TV에서 하는 북한 만화를 보면서 “아, 외국말이네!” 하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는 친구가 있다. 그 말을 듣고 북한은 외국이 아니라고 딴에는 차근차근 설명을 해줬단다. 그런데 아이는 유치원 선생님이 우리와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은 외국 사람이고 외국 사람이 쓰는 말은 외국말이라고 했다면서 이모가 틀렸다고 하더란다. 그 모습을 보고 정말 이 아이들이 자라면 북한을 같은 민족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저 우리와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 당연한 외국인으로 느낄 수도 있겠구나 싶더란다. 그래서 자기가 대단한 애국자도 아닌데 처음으로 통일이 하루 빨리 되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서글퍼 했다.
만약 이대로 통일이 되지 않는다면 이런 웃지 못 할 일이 현실이 될는지도 모른다. 같은 민족이 외국인이 되는 날이 오기 전에, 정대세와 추성훈 같은 가슴 아픈 유산을 물려받은 세대가 더 나오기 전에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오명을 씻는 날이 하루속히 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다행히 철통처럼 막혀 넘나들 수 없었던 과거에 비해 해로로 육로로 금강산도 가고 북한에 남한공장이 세워지기도 하는 세월이니 언젠가는 꼭 남북을 가로막은 철조망을 걷어내고 국경 아닌 국경을 없애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 믿는다. 그날이 오면 추성훈이나 정대세 같은 선수들을 보더라도 그저 인기 있는 운동선수로만 볼 수 있으리라. 마음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감정의 동요 없이 그들을 온전히 멋있는 스포츠 스타로만 바라볼 수 있는 그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정말 좋겠다.
(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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