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명의 예외도 없다.
2009년 5월 23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을 지냈던 노무현의 죽음을 보면서 나는 이 섬뜩한 말이 생각났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이 조차도, 비록 스스로 그 권력을 산개시키긴 했지만 직함만으로도 가히 누구도 넘보지 못할 권력을 누렸던 그 이조차도 피할 수 없는, 그래서 단 한 명의 예외조차도 인정치 않는 무시무시한 그 법칙이 새삼 무서워졌다. 그 법칙이 뭐냐고? 죽음이라고? 천만에. 그 무시무시한 법칙이 죽음이라면 오히려 감사할 일이다. 아직도 자연법칙이 우리를 보호해주고 있다는 반증이기 때문에. 그러나 자연법칙은 이제 우리를 보호해주는 마지막 법칙이 되지 못한다. 죽음마저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모든 존재의 소유권자는 따로 있다. 그것이 바로 절대권력, 자본이다. 나는 김상봉이 절대자본주의라고 부른 이 절대권력이 노무현을 죽음에 이르게 한 배후세력이고 근본원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게 웬 난데없는 소리인가. 그의 죽음에 자본이 만장을 두르고 있다니.
많은 이들이 지적한바, 김영삼이 엉겁결에 발견한 세계화에 김대중이 열쇠를 찾았고, 노무현이 열쇠를 꽂았고, 이명박이 열쇠를 돌렸다면 이들은 다들 한 줄의 계보로 꿰어지는 한 줄기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좌도 우도 아니고 진보도 보수도 아니다. 그런 분류법으로는 20년이 가까워지는 이 현상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한 때는 권력이 자본을 좌지우지 했었다. 자본은 권력의 강력한 무기인 듯 했다. 그러나 이 땅의 대통령들이 4대째 노력해온 결과-그들이 하수인으로 활약을 했건 자진해서 그리했건간에- 후발공업화사회라는 대한민국이 현상만큼은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자본을 권력의 배후로 올려놓고 국가권력은 자본의 권력대행자쯤으로 내려앉게 만들었다. 대행자, 혹은 하수인은 그의 임무가 다하면 조직에서 제거된다. 그래야 다음 하수인이 위탁받은 권력을 제대로 휘두르면서 자본의 충실한 종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제거의 방식은 다양하다.
돈이 중심인 자에게는 돈을 제거함으로써, 명예가 중심인 자에게는 명예를 찢어발김으로써, 자존심이 중심인 자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의 한 조각까지 뭉개버림으로써. -전두환이 아직도 뻔뻔하게 살아있을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중심을 무너뜨리지 못했던, 아직은 어설펐던 당시의 제거 방식 때문이었다-
노무현이 도덕성에 자신의 존재를 세웠다면 그 도덕성을 철저히 궤멸시키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고작 600만달러 정도라면 그의 도덕성을 뭉개버리기에 충분한 액수였을까? 국가권력이 터뜨리고 언론이 적당히 주고받는 핑퐁게임에서 진실이 어떠했던 간에 그 이는 사실상 사형선고를 받은 거다. 자본은 형체가 없다. 손에 피를 묻힌 이는 자명하나, 망나니는 선고를 내리는 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세계화 혹은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전대미문의 제국화한 자본 속에서는 권력자였던 이들조차 우리들처럼 단지 소모품에 불과하고, 그러므로 그들의 역할이 다하면 자본에 의해 내쳐지는 운명일 뿐이다. 그리고 그 운명을 우리는 2009년 5월 23일 아침에 섬뜩한 자살 소식으로 접했다. 제거의 방식이 조금 더 복잡할 뿐, 용산에서 분사한 많은 이들, 가족들의 생계를 이어갈 길이 막막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많은 가장들의 죽음과 노무현의 죽음은 이런 시야로 본다면 뭐가 다르겠는가. 그들 모두 자본으로부터 용도폐기당한 소모품에 불과한 것을.
노무현의 죽음을 격하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의 죽음을 접하고 망연자실, 어떻게 이런 일이, 하고 가슴이 크레바스 꺼지듯 푹 꺼져버린 상실감은 너무나도 크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가 그가 지닌 권력의 크기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인간의 죽음은 그가 누구이든 부재의 크기는 같다. 그래서, 그의 죽음을 접하고 잠시 망연자실을 수습한 후 그의 죽음 뒤에 도사리고 있는 자본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실제로 뇌물 수수를 했건 아니건 이제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가 손상 받은 명예의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건, 해결방도가 전혀 없어 그런 극단의 죽음을 선택했건 그것은 전혀 중요치 않다. 검찰이 스스로 판단하여 그를 수사했건 지금까지 이런 류의 일에 늘 그래왔듯 저 높은 곳에 있는 권력의 권모술수로 빚은 검찰의 프로젝트이건 그것도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사실을 인지하고 그 사실의 규명에 초점을 맞췄건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사회적 생명을 박탈하고자했건 의도의 구분을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이의 죽음에 자본과 권력의 검은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다는 거다. 이 자본과 권력의 검은 그림자 앞에서는 그 누구도 스스로 자존을 지킬 수 없다는, 예외 없는 원칙, 용도폐기의 원칙이 작두날처럼 시퍼렇다는 거다. 일국의 대통령을 지낸 그 이가 그럴진대, 이름 없는 백성은 일러 무엇 하겠는가. 바로 이 점이 무섭다는 거다. 불과 2년 사이에 생존의 공포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가 되어 버린 이 땅,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주어진 양만큼의 숨쉬기 뿐이라는 것이 무섭다는 거다.
그래서 어쩔 것인가. 그 공포 뒤에 숨어 두려운 눈으로 세상을 훔쳐보면서 납작 엎드려 볼품없는 생존에 감사할 것인가. 아니면 이 희망 없는 세상에 비수라도 꽂을 것인가. 그렇다고 자본이 눈이라도 깜짝하겠는가.
그 이의 죽음 앞에 그 이가 실은 진보가 아니고 보수였다는, 지겨운, 진보와 보수의 편가름은 아무런 의미 없다. 그러나 이제 이 땅은 그 이의 빈소 앞에 다시 좌파 우파의 딱지 붙이기 놀이에 열중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그 허망한 땅따먹기 놀음 앞에 정작 이 땅의 주인인 백성들은 자신들의 삶이 더 말라비틀어지는 광경을 목격해야만 할 거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절대자본주의의 날카로운 칼춤을 막아낼,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마지막 기회를 그가 자신의 죽음으로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 이의 죽음을 접한 직후, 대한민국 경제와 주가의 흐름을 염려하던 언론들의 한심한 작태는 지금이 바로 그 때임을 역설로 증명한다.
한 인간의 애통한 죽음 앞에 경제의 깃발을 높이 세우는 이 한심하고 천박한 역사를 바로잡는 유일한 길은, 서슬 퍼렇게 치켜 뜬 눈으로 세상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일이고, 약은 계산속으로 인간의 가치를 계량하는 짓거리를 멈추는 일이고, 이제는 탐욕과 무자비함의 끝까지 가 버린 삶의 방식을 스스로 바꾸는 일이고, 함께 사는 방법을 힘겹겠지만 복원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이의 죽음으로 가까스로 마련한 불씨가 꺼지지 않게 명징한 의식으로 살아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산 자의 의무이고 살아남은 자가 가 버린 이를 위해 부르는 영혼의 진혼곡이다. 그마저도 방기해버리고 또다시 꿈틀거리는 부동산 경기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금융시장을 기웃거린다면 우리는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또한 자본으로부터 언제든 용도폐기를 당할 가능성의 한 가운데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 이와 우리는 서로 다르지 않다. 그 이도 우리도, 단 한 명의 예외도 인정하지 않는 자본의 원칙에 포섭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이의 죽음을 의미 있게 만드는 길은 이제 단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 이제는 새로운 법칙, 새로운 사회구성체, 새로운 삶의 원칙을 만들고 다듬고 세워야 한다. 그 길 외엔 남은 길이 없어 보인다. 그 이가 그것을 의도했건 아니건 그것은 별 의미 없다. 역사를 어떻게 꾸리는가는 이제, 살아있는 자, 살아남은 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최초로 의제를 만들 줄 아는 대통령이었던 그 이를 보내며 그 이의 죽음이 제발, 천박하게 추락해버려 탐욕과 모순이 강물처럼 넘실대는 이 땅을 자존과 상생이 넘실대는 땅으로 바꿀 단초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대한민국 제 16대 대통령, 절대권력을 산개시키는 소중한 순간을 이 땅에 선보인 그 이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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